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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인칼럼

닮고 싶고 되고 싶은 2005 과학기술인

NEW 닮고 싶고 되고 싶은 2005 과학기술인

  • 관리자
  • 2008-07-16
  • 56030

"무식하면 용감하잖아요. 아무 눈치 안보는 당당함도 생기고요."
아주대 수학과 고계원(54) 교수는 자신의 삶을 이끌어온 원동력을 엉뚱하게도 ‘무식함’으로 표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학 생활 시절.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지내는 동안 결혼과 출산이라는 두 가지 ‘거사’를 뚝딱 해치웠다.
배가 불러 뒤뚱거리며 출산 직전까지 학교를 다닌 그를 보고 친구와 교수가 깜짝 놀랐다. 지금이야 공부하면서 아이를 낳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그가 다닌 수학과에는 13년간 여성 박사가 배출되지 못할 정도로 여학생 숫자가 적었던 때문도 있었다.

○ “원인 분석하고 결과 얻는 수학은 매력적”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민감하게 여겼다면 그렇게 당당하게 학교를 다니지 못했을 거예요.”

그는 이 용기의 근원이 ‘무식한 탓’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마음을 두면 문제가 풀릴 때까지 다른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고 한 가지만 생각하는 집중력이 그가 표현한 ‘무식’의 실체다. 복잡한 현상을 몇 줄의 수식으로 깔끔하게 표현하는 수학적 아름다움은 어쩌면 이런 그의 성향과도 닮았다.

고 교수가 수학의 길로 접어든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고등학교 물리 교사였던 아버지는 어린 그의 호기심을 늘 자극하고 수학적 상상력을 이끌어 주었다. 논리를 따지고 원인을 분석한 후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수학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은 순조로웠다. 언니가 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과 경쟁하며 공부하는 과정은 그에게 큰 자극이 됐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학자의 길에 들었다. 120년 전통의 명문 여대인 브린모어대에서 종신직 교수 자리를 받은 것.

하지만 뭔가 허전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조차도 여성 수학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선배 여성 수학자가 눈에 띄지 않으니 후배들이 도전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눈치 안보고 수학이란 한우물만 팠죠

1991년 귀국해 아주대에 자리를 잡으면서 동료들과 함께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선배로서 미미한 역할이라도 실천하겠다는 지극히 단순한 욕심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어요.”

이 발걸음은 10년이 지나서야 결실을 맺었다. 2004년 출범한 한국여성수리과학회는 이런 고민과 땀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다. 그는 초대 회장을 맡아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수학자를 꿈꾸는 후배 여학생들을 위한 역할 모델을 자임하고 나섰다.

수학자로서 또 교육자로서 그가 택한 길은 어쩌면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여고시절 방학이 되면 그는 아버지와 함께 시골에서 야학을 했다. 책상도 없는 학교에서 보릿고개도 넘지 못한 시골의 아이들과 함께 지낸 시간은 ‘소중히 간직할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케 했던 계기였다.

고 교수는 아버지와 언니 덕분에 쉽게 진로를 선택해 ‘학문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이제 고 교수 덕분에 후배들이 그 기쁨을 누릴 차례다.


●고계원 교수는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수학이 좋아서 오로지 수학과를 지망, 1973년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후 유학길에 올랐다. 1980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1984년 미국 브린모어대에 교수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종신직 교수 자리를 마다하고 1991년 귀국해 현재까지 아주대 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4년 한국여성수리과학회를 설립, 수학자를 꿈꾸는 여학생들에게 격려가 되고 용기를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청소년에게 한마디

인생은 짧은 단막극이 아니다. 골이 있으면 마루가 있게 마련이다.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안주하지 말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출처: 동아일보 2005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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