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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새로운 발명품 또는 아이디어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아왔다. 우연히 얻게 된 불, 둥근 바퀴, 그리고 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여러 가지 다양한 발견들에 의해 권력의 이동과 문화의 모습은 물론도 인간의 가치관까지 변화되어 왔다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경험하고 있다. 또한 자연현상을 더 많이 이해하고 이를 실생활에 응용함에 따라, 사람의 생활은 문명의 이기에 의존적이 되었으며 때로는 이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였다. 이러한 많은 이해들 중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것을 한 가지 꼽으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유전자의 발견이다. 1900년도 초부터 2차 세계 대전까지의 시기는 유전학의 황금기라 불린다. 1900년도 초까지는 DNA가 유전 물질이라는 확정적 증거가 없었지만, 이 시기에 발전된 과학을 통해 인간은 DNA가 유전 물질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관련된 주요 발견을 연도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869년도 Friedrich Meishcer는 물고기의 정자와 동물의 상처 고름에서 DNA를 정제하여 이를 nuclein이라고 명명하였고 후에 정정되어 DNA로 불리게 되었다. 1914년 Robert Feulgen에 의해 DNA가 세포의 핵에 존재함을 밝혔다. 1920년에 생화학자인 Levene은 DNA가 5탄당을 기본 골격으로 질소를 함유하는 4종류의 염기인 시토신, 티민, 아데닌, 구아닌으로 구성된 고분자라는 것을 밝혔다. 1920년도부터 1940년대에 걸쳐 Fredrick Griffith, Oswald Avery 그리고 Max Delbruck과 Salvador Luria 등에 의해 단백질이 아닌 DNA가 유전 물질임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실험적 증거들이 제시되었다. 마침내 1952년 Alfred Hershey와 Martha Chase는 동위원소로 표시된 인산과 황을 사용하여 DNA가 유전 물질임을 증명하여 수십 년간에 걸친 유전 물질의 논쟁에 대한 종지부를 찍었다. DNA가 유전 물질임이 밝혀짐에 따라 DNA의 구조, 유전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 그리고 세포 분열에 의한 유전자 증식에 대한 문제를 풀기 위해 과학자들은 고민하게 되었다. 1951년 James Watson과 Francis Crick이라는 젊은 두 과학자는 X-선 회절법을 이용하여 DNA의 3차원 구조를 처음으로 밝히게 된다. 이들의 3차원 구조는 (1) DNA가 어떻게 4종의 핵산 단위체를 사용하여 2중 나선의 고분자로 존재하며 (2) 이중 나선을 구성하는 DNA의 염기는 어떻게 서로 상보적으로 짝을 이루며 유전 정보를 저장하고 (3) DNA가 복제될 때 어떻게 딸세포로 복제된 유전자 사본이 전달되는 지를 잘 설명하였다. DNA의 구조가 밝혀진 이후 생물학의 연구 방향은 급변하게 되어 소위 “분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가 탄생하였다. 분자생물학은 분자 수준에서 생명 현상을 규명하려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그 중심에는 유전 정보의 흐름을 관장하는 “센트럴 도그마”가 존재한다. 유전자, 즉 DNA에 저장된 유전 정보를 이용하여 단백질이 합성되는 것이 유전자의 발현이라는 센트럴 도그마가 형성되면서, 과학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유전자가 발현되고 또한 유전자 발현은 어떻게 조절되는 지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지금도 이러한 과제를 풀기 위한 연구를 계속 진행 중이다. 유전자의 발견에서 시작된 DNA의 신비가 하나씩 벗겨짐에 따라 인류는 이를 응용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박테리아의 유전자 발현 조절과 세포의 기능을 이용하여 박테리아, 효모, 동물 세포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단백질을 무한대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인슐린, 성장호르몬 등은 모두 인위적인 발현 시스템을 사용하여 대량 생산이 되어 현재 시판되고 있다. 단백질의 과발현에 그치지 않고 시험관에서 DNA를 원하는 대로 자르고 붙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면서 인간은 세상에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기능성 단백질을 창조,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여러 종간의 비슷한 유전자를 모아 시험관에서 인공 재조합이 가능하게 되면서 원하는 최적화된 효소나 단백질을 생산하기도 한다. 이러한 단백질들 중 많은 경우는 단백질 촉매인 효소로 쓰이게 되면서 화학적 반응 공정을 단축하고, 생산 비용을 효과적으로 경감하여, 결과적으로 산물의 생산 단가를 낮추게 된다. 이와 더불어 인류는 DNA를 질병 치료에 적용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90년에 시작된 인간 유전자의 서열 분석은 2001년 초에 완성되어 지금은 인간의 유전자 서열이 모두 밝혀져 있다. 따라서 이들 정보를 응용하려는 기술이 다양한 분야에서 시도되는 소위 “포스트 지놈 시대“가 도래하였다. 각 개인에게 최적화된 맞춤형 약물을 개발한다든지, 세포 내에서 발현되는 모든 단백질을 총체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노력 등이 일예이다. 또한 약 20년 전에 시작된 유전자 치료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켜 여러 가지 불치의 병들에 대한 유전자 치료가 시도되고 있다. 3000~5000개 유전자를 조그마한 칩에 집적시키고 이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유전자의 발현 차이를 한번에 볼 수 있게 되어 치료뿐만 아니라 진단에 대한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유전자의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시작된 인간의 호기심은 DNA의 발견과 그 구조가 밝혀짐에 따라 유전자에 대한 새로운 믿음들을 발전시켰다. 앞으로 우리는 계속 새로운 발견과 이를 응용하는 새로운 학문의 분야와 문화를 주도하게 될 것이다. 나노기술과 유전자 조작 기술, 그리고 단백질 공학과 생물정보학이 도입된 새로운 퓨전 학문이 도래하고 있는 이 시점에 인류는 기술적으로 새로운 도약을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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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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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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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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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국회의원 10명이 17대 국회의원으로 받은 첫 세비 840만원 중 노동자의 평균 월급인 18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를 정책연구비 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당에 헌납했다고 한다. 원래 민노당 의원들이 국민에게 약속한 사항이니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즈음 돌아가는 국회 행태를 보면 그나마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의원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개원 23일 상임위조차 구성 못해 17대 국회 임기가 시작된 지 벌써 23일이 지났다. 그동안 국회가 한 일은 국회의장단 구성, 의장 개원사와 대통령의 개원 축하연설을 들은 것이 전부다. 총 회의시간으로 따지면 3시간 조금 넘는다. 물론 3시간 정도의 회의 참석으로 받은 봉급은 아니지만, 여하튼 거액의 봉급을 받으니 대단한 고급 직업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야 대표를 비롯한 국회의원들은 국회가 개원되기도 전에 국민에게 얼마나 많은 약속을 했던가. '싸움을 하지 않는 상생 국회', '생산적 국회', '민생 국회'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5월 3일에는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국민 앞에 상생정치를 하겠다는 '합의'보다 더욱 강도가 높은 '협약'을 발표했다. 그러나 지금 국회는 '협약'에 의한 상생은 고사하고 자리다툼 싸움이나 하고 있다. 그것도 스스로 만든 국회법까지 위반하면서 대국민 약속을 어기고 있다. 국회법 제15조에 의장과 부의장은 총선거 후 최초 집회일에 선출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첫날인 5일 의장만 선출하고, 부의장은 이틀 뒤인 7일에 선출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국회는 그 후에도 계속 반칙이다. 국회법 제48조에 상임위원의 선임은 최초 집회일부터 2일 이내, 또한 제41조에 국회 상임위원장의 선출은 최초 집회일부터 3일 이내에 하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이 규정대로라면 7일에는 상임위원 선임을, 그리고 8일에는 상임위원장을 선출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려 2주일이 지나도록 상임위가 구성되지 못했으니 어떻게 '상생 국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제16대 국회도 최소한 첫날은 국회법을 어기지 않았다. 상임위원 구성과 위원장 선출은 서로 싸우다가 16일 만에 끝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지루하게 싸우지는 않았다. 문제가 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상임위 전환은 이미 기본 원칙에 합의했기 때문에 다만 시기의 문제다. 위원장 배분은 관례에 따르면 된다. 국회의 제1당과 제2당의 위치는 영구불변도 아닌데, 왜 억지만 부리고 있는지 국민은 답답하다. 지금 얼마나 많은 국정 현안이 쌓여 있는가. 전국을 들끓게 하는 신행정수도 이전, 병원노조 파업, 이라크 추가 파병, 주한미군의 대규모 감축, 북한 핵 관련 6자회담, 국민연금, 일자리 창출, 태풍 피해 등등 현안이 산적해 있는데 국민의 대표기관이라는 국회가 본회의는 물론 상임위 한번 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민초만 불쌍하다. 오죽하면 '지둘려'라는 별명의 김원기 국회의장이 화가 나서 '서둘러' 의장이 돼 국회법에 부여된 권한을 행사하겠다고 했겠는가. 상임위원장 배분 하나 협상을 못해 의장에게 권한을 빼앗기는 여야의 정치력이라면 제17대 국회의 앞날이 걱정된다. 여야가 상생을 못하면 의장은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며, 또한 부여된 의장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스스로 만든 법도 안 지켜서야… 국회는 입법기관으로서 법 제정만 하면 끝이 아니다. 국회 스스로의 운영을 규정한 국회법부터 제대로 지켜야 한다. 그게 가장 기본적인 책무다. 이제라도 여야는 총선 직후 국민에게 보여 주었던 초심을 되새기고 최소한 국회 원 구성이라도 해서 일자리와 국민연금과 태풍과 파병 문제의 와중에 상심한 국민에게 위로의 말이라도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동아/04.06.21/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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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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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보면 도시라든가 국가는 인류의 이동생활이 끝나고 정착단계에 들어가면서 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목민에게 있어 국가니 도읍이니 하는 것들은 농경민의 경우와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천도(遷都)라는 것도 어쩌면 정착생활을 하는 농경민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역사 상 최초의 천도는 단군이 세운 고조선 때의 일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 조에는 여러 개의 지명이 보이는데 우선 환웅(桓雄)이 세상에 내려와 처음 자리잡은 백악산(白岳山) 신단수(神壇樹) 아래 신시(神市)가 있고, 그 후 단군이 태어나 고조선을 세우고 처음 도읍한 곳은 평양성이라고 하였다. 이어 단군은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阿斯達)로 옮기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천도이다.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성, 환도성 등 압록강 유역에 도읍을 두다가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하였으며 멸망하기까지 도읍이었던 곳은 586년(평원왕 28)에 천도한 장안성(長安城)이었다. 백제도 위례성, 한성 등 한강 유역을 도읍으로 하다가 475년 고구려에게 쫓겨 웅진으로 천도하였고, 538년(성왕 16) 다시 사비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삼국시대에는 물론 통일시기를 거쳐 고려에게 왕조를 내어줄 때까지 줄곧 경주 한 곳만을 도읍으로 삼았다. 천도를 안 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으나 분명한 것은 수도를 옮기자는 논의는 여러 차례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본기에는 통일 직후인 689년(신문왕 9) 왕이 달구벌(達句伐)로 천도하려다 그만두었다는 간단한 기록이 별다른 설명 없이 전하고 있다. 통일 후 신라는 왕이 거처하고 있는 수도가 국토의 동남부에 편재(偏在)해 있는 약점을 보강하기 위하여 5소경(小京)제도를 두어 운영하였다. 동, 서, 남, 북, 중원경을 두어 지역적 한계로 인한 통치력의 공백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발전은 경주지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00여 년 뒤 지방 호족세력의 발호와 권력을 둘러싼 귀족 내부의 파쟁이 일기 시작하더니 10세기에 들어 급기야 최후를 맞고 말았다. 하지만 경주 한 곳에 도읍했던 것이 신라 멸망의 원인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이처럼 신라를 제외한 고대사회에서의 천도는 대부분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 경위를 확인할 길이 없는 고조선시대의 천도는 차치하고라도 고구려나 백제사에 있어서의 천도는 거의 모두가 전쟁이나 외침 등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 이후 고려는 몽고 침입 때 잠시 강화도로 천도하였다가 귀환한 일이 있었고, 조선의 경우는 한 번도 천도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고려는 특이하게도 수도인 개경과 함께 서경, 남경 등 3경(京) 제도로 국정을 운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 이상 서경으로의 천도를 위한 끈질긴 시도가 있었고, 말기에는 한때 한양으로의 천도가 추진되기도 하였다. 신왕조 개창 후 긴 논란 끝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천도 논의가 있었고, 후기에 와 정조는 수원으로의 천도를 결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다. 최근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놓고 한동안 소란하던 끝에 어느 날 갑자기 '천도'라는 용어가 튀어나왔다. 어차피 이 말을 꺼낸 이들도 천도면 안 되고, 이전(移轉)이면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천도'라는 용어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엉뚱한 소동은 이쯤에서 접어야 한다. 개인집의 이사도 어려운 법인데 국가의 막중지대사이다 보니 시끄러울 수밖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긴 역사의 안목으로 보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인가를 가늠해보는 일일 것이다. (경인일보/04.07.02/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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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작성자박성숙
- 작성일2008-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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